말의 힘: 막말과 반말의 본질적 차이
상대방의 언행에 화를 내야 할 상황은 상대가 반말이 아닌 막말을 했을 때다. 존댓말을 사용하면서도 얼마든지 막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말과 막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거나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경우를 보면, 진정으로 똑똑한 것인지 아니면 착각하는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운명: 위대함과 비천함의 양면성
한국인은 위대함과 비천함이라는 두 가지 운명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현재의 한국과 북한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비천하게 사는 모습과 달리, 한국은 5천 년 역사상 최대의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위대함까지는 아니며, 풍요와 번영을 발판 삼아 위대함으로 나아갈 기로에 서 있다. 두 번째 방법은 한국어가 위대함과 비천함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적 특성 때문에 한국과 북한의 운명 역시 번영과 비천함으로 갈리게 되었다. 북한이 공산주의와 독재 때문에 비천하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러시아, 중국, 베트남 등 다른 공산주의 및 독재 국가들도 북한만큼 비천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언어의 영향이 크다. 저자는 "말이 곧 문화이고 문화가 곧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Language is everything’이 된다. 언어가 한 민족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언어의 특성이 그 민족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국호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과 고종의 파천
우리나라 국호인 '대한민국’에서 '대한’은 역사적으로 큰 업적이나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대영제국, 대일본제국처럼 실제로 크게 이룬 것이 있는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식민지 해방조차 우리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기에 '대’를 붙일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이는 마치 정신 승리거나 타국의 사례를 무작정 따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된다. '대한민국’의 '대한’은 나라를 망하게 한 고종(이명복)이 아관파천 직후인 1897년에 만든 대한제국에서 따온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와 '제국’을 선포한 것은 비루하고 비천한 처지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고종은 11년 동안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등 4개국 공사관으로 총 7번의 파천을 시도했으며, 이 중 6번은 공사관 측에서 받아주지 않아 실패했다. 고종은 국권 유지에는 관심이 없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도망갈 궁리만 했으며, 심지어 미국 공사관 옆에 황실 도서관을 지어 유사시 보호받으려 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기에 조선은 '주인 없는 나라’로 비쳤을 것이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지만 입구 컷을 당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심지어 고종은 황제 즉위 두 달 만에 또다시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무능하고 멍청한 왕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중 만든 부끄러운 국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대’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세대에서 직접 위대한 업적을 만들 수 있으며, 그 길은 현재 문화 분야에서 열려 있다. 다만 K-POP, K-드라마 등 한류 인기에만 매달려서는 재미있고 매력적인 국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위대한 국가는 될 수 없기에, 우리가 처한 위치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한국어의 진정한 위대함: 3차원 언어의 특징
한국어가 가진 위대함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소리의 완전함, 단어의 완전함, 문장의 완전함이다. 흔히 한국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감정/색깔 표현의 다양성, 한글의 발음 기관 본뜸, 빠른 타이핑 속도는 우수함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 첫째, 소리의 완전함은 초성, 중성, 종성 세 개의 소리가 짜여 완벽한 소리를 내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 발성의 최종 완성된 구조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어 소리를 아름답고 섹시하게 느끼며, K-POP이 다른 아시아 언어보다 서양인들에게 더 좋게 들리는 이유가 된다. 둘째, 단어의 완전함은 한글이라는 표음 문자와 한자라는 표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의미의 단어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영어는 표음 문자의 한계로 새로운 의미 표현이 어렵거나 단어가 길어지는 반면, 한국어는 다양한 소리 조합을 통해 무한한 단어 생성이 가능하다. 셋째, 문장의 완전함(완유함)은 단어 배열이 완전히 자유로워 문법을 몰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특징을 뜻한다. 이로 인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기 쉬워진다. 이러한 한국어의 세 가지 위대한 특징은 ‘선진함’, 더 정확히는 '3차원의 선진함’으로 요약된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들이 2차원 언어인 것에 비해 3차원 언어이다. 2차원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발음이나 어순이 조금만 달라져도 못 알아듣는 반면, 한국어 사용자들은 외국인의 부정확한 발음도 3차원으로 소리를 인식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국 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이유이자, 작가들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독창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음악가들이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며, 안무가들이 독창적인 춤을 만드는 비결이 된다.
한국어의 치명적 단점: 존비 구조와 폐쇄성
한국어의 위대함 뒤에는 ‘소통 형식의 불완전함’, 즉 '존비의 후진함’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숨어 있다. 이는 서양어처럼 존대어와 격식어의 형식이 아닌, 존대어와 비대어(반말)의 이분법적 형식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 존비 구조는 마르크스나 공자 사상처럼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나 현실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기심과 불완전함 때문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잘 보살피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잘 따르는 공자 사상 또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이러한 '언어의 존비’는 사람을 존과 비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공자 사상과 유사하게 현실에서 갈등, 고통, 분쟁, 아픔, 슬픔의 원인이 된다.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한’의 실체는 바로 이 소통 형식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다. 이 네 번째 특징이 나머지 세 개의 위대함마저 짓밟는다는 것을 북한의 현실이 증명한다. 북한이 '최고 존’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최고 존엄’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어(조선어)가 사람의 지위를 언어의 종류로 따지기 때문이다. 존과 비로 신분이 나뉘는 전체주의 일인 독재 체제에서 독재자는 자연스럽게 최고 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비 구조는 공산주의 평등 이념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최악의 비천한 국가로 만들었다. 한국어의 존비 구조는 능력 있는 사람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막는 폐쇄성을 낳는다. 서양어는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의 역할이 바뀔 수 있지만, 한국어에서는 존과 비가 한번 결정되면 고정되어 버려 사회적 에너지가 낭비된다. 존이 비를 억누르는 이유는 비가 존이 되면 존이 비가 되어 소모당하거나, 존의 가치가 희귀성에 따라 높아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노비 종모법을 시행하고, 북한이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탈북자를 잡아들이는 것은 비의 숫자를 늘려 존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폐쇄적 속성 때문이다. 조선의 쇄국정책, 북한의 공포정치, 그리고 한국의 온라인 카페 등업 신청이나 국내 IT 기업의 폐쇄성은 모두 이러한 존비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반면 구글과 유튜브의 성공은 개방성 덕분이다. 삼성 스마트폰의 위기도 애플처럼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제시하는 개방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삼성은 기술 과시성(폴더블폰)만을 보여줄 뿐, 사용자에게 진정으로 구매 동기를 부여할 '철학’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과거 LG 휴대폰 사업부가 롤러블폰과 같은 기술력을 가졌음에도 망한 이유와 같다. 기술보다 사용자 경험을 우선시하는 애플과는 확연히 다르다. 결론적으로 한국어가 가진 3차원의 선진함이라는 장점과 존비의 후진함이라는 단점을 동시에 인지하고,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려야 한다. 즉, 존댓말을 버려야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 이후의 ‘아웃풋’: 대파토론과 외국어 습득
깨달음은 곧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실질적인 '아웃풋’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장난에 불과한 깨달음은 사기와 다름없다. 저자의 아웃풋은 ‘대파토론’, '대파 영어’이며, 나아가 어떤 외국어든 6개월 안에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문과적 방법이지만, 미래에는 칩 하나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이과 기술이 발전할 것이기에 6개월도 긴 시간이다. 우리가 3차원 언어를 사용하므로, 2차원 언어를 6개월 안에 배우는 능력은 이미 한국인에게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저자의 '6개월 외국어 마스터법’은 사기가 아니며, 기술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의 주장일 뿐이다. 공짜로 제공되는 이 방법을 사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3차원의 눈으로 토론을 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양쪽 모두 말장난, 억지, 선동, 망상에 빠져 대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파토론’을 통해 이러한 잘못된 토론 방식을 개선하고, 공정하게 점수를 주고 승복하는 스포츠 형태로 발전시켜 K-POP, K-드라마와 함께 'K-토론’을 한류 콘텐츠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위대한 국가로 거듭나는 길이다.
우리 민족의 고질병: 내부 파멸과 외부 침략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내부적으로 이간질하고 싸우며 외부 침략만 당해왔다. 침략을 당한 것이 부끄러워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과거에는 침략하여 지배하는 것이 강함의 증표였다. 현재는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이러한 내부 분열이 지속된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사상과 비전이 성공하지 못하면, 청년들의 높은 자살률,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갈등, 저출산 문제, 중국의 문화 침탈, 북한의 핵 위협 속에서 현재의 번영이 끝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력으로 세상을 지배해야만 생존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파토론’과 '중대 사상’과 같은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인문계는 소크라테스 이후 2천 년 동안 발전이 없었다고 비판하며, 영적 문제와 세속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영적 문제는 신앙인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세속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종교계 기득권(목사, 신부, 스님, 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저자를 반대할 것이며, 대중은 학력 없는 저자가 유명해지는 것을 시기할 것이다.
존댓말의 허상: 사람을 나누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구조
일본어나 몽골어와 달리 한국어의 존댓말은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며 고통을 주고 억압하는 개념을 내포한다. 몽골과 일본이 대제국을 건설했던 것은 내부적으로 힘을 응집했기 때문이며, 존비 구조의 언어 체계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나이에 대한 차별 개념이 없는 몽골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어의 존비 구조가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한국어가 현재의 존비 구조에서 세계 공용어가 된다면, 세계인들은 처음 만났을 때 누가 형, 언니, 선배인지 서열을 정해야만 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에 놓일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인사 똑바로 안 하냐’고 하는 모습처럼, 이러한 미묘한 상황을 세계로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 존비 구조를 버려야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문제 발생 시 서로 질책만 하는 가족은 불행해지는 것처럼, 질책만이 지배하는 존비 언어 문화 속에서는 불행이 증폭된다. 군대 내 폭력, 가혹 행위, 자살 사건 등은 존비 구조의 언어가 질책을 부르고 폭력을 부르며 결국 자살이나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의 결과다. 존비 구조의 언어를 가진 한국인들만의 문화는 서양의 운동 문화와도 확연히 다르다. 존비 구조의 언어에서 질책은 존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존은 잘못을 하더라도 비는 질책할 수 없다. 정치권의 여당과 야당이 서로 질책만 하고 협력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이러한 질책의 이면에는 '나는 완벽하고 절대 질책받을 일이 없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능력 있는 비가 갑의 역할을 해야 할 때도 그것이 불가능한 사회적 비효율을 초래한다. 우리나라 정치권이 개판인 이유는 양쪽 모두 부패하고 잘못되었음에도 ‘나는 정의롭다’, '나는 깨끗하다’며 상대방을 질책만 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명언처럼, 국민 수준이 높아져야 정부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 저자는 '대파토론’을 통해 국민 개몽 교육을 하고자 한다. 존비 구조의 언어는 질책, 포용, 가혹행위, 자살 사건, 멸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또한 편향성, 무소통, 갈등 방치, 멸망으로 이어진다. 반면 중대 구조의 언어는 소통, 협력, 번영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가족에게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대도 비대도 아닌 '중대’를 해야 한다. 존대의 개념과 마음은 형식으로 제어되거나 보장될 수 없으며, 존대가 있는 한 반드시 비대가 따라온다. 개인적인 경험상 존대와 도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대와 비도덕적인 행동을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도덕을 더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더 안 지킨다’는 명언으로 이어진다. 국회의 청문회에서 존댓말로 시작했으나 결국 감정 싸움으로 번지는 모습, 도덕적 위선을 보인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사례, 그리고 불륜 중개 사이트 회원 중 고위 공무원, 정치인, 목사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치’를 강조해야 한다. 반말 철학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이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화를 내지 않는다. 반면 존댓말 철학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이 반말을 하면 화를 낸다. 이는 '도덕을 더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더 안 지킨다’는 명언과 일맥상통한다. 상대방의 반말이 예의 없다고 느껴진다면, 수준 높은 도덕적 차원에서 포용하거나 이해시켜야지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존댓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존댓말을 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들’과 ‘서로 존댓말을 하지만 실수하면 나는 반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악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멍청함과 사악함은 같다고 말한다. 존댓말 상황에서는 갈등 해결의 빛이 보이지 않지만, 반말 상황, 즉 중대어 상황에서는 해결의 길이 보인다. 그 해결책이 바로 반말로 글로 토론하는 '대파토론’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가르치고 배우거나 급한 상황, 의견이 부딪힐 때 존댓말이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김민재 선수가 수비 강의 중 나이가 같으니 반말하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도 '너도 반말해’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인간관계를 넓히고 사회적 활동 연령을 늘리며,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반말 소통 시에는 반드시 부르기 편한 반말 이름을 따로 만들어서 부르고, 서로 격을 지키며 반말하되 존댓말을 하는 마음, 그 자세만 짧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수하고 깨끗한 반말, 즉 '중대어’를 사용해야 한다. 군대 내 서열 문화나 정치권의 모습은 존비 구조가 만드는 짐승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네가 지금 권력을 누리더라도 언젠가는 비하당하는 날이 올 것이다. 존댓말은 상대를 속이고 가스라이팅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편향적 소통의 기본 바탕이 된다. 사기꾼들이 자기만 말하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편향적 소통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과 같다. 종교 사범들이 사후 세계를 팔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파토론’은 올바른 소통을 위해 반말로 글로 토론하는, 검증된 시스템이다. 의사소통에 있어 반말과 존댓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반말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쁜 것은 '서로 존댓말 하자’는 사회적 약속이 깨졌기 때문이지, 반말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존댓말이 좋으면 자신이 하면 되고,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화를 내야 할 상황은 반말이 아니라 '막말’이다.
새로운 사상가 류기풍: 중대 사상의 길
저자는 소크라테스, 마르크스, 공자, 맹자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지금 이 나라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위해 위대한 사상가가 되어 주겠다고 선언한다. 한국인들이 서로 깎아내리고 헐뜯는 질책 위주의 비천한 문화를 가진 이유는 존비 구조의 언어 때문이며, 상대가 잘나서 존이 되면 자신이 비가 되어 고통받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대파토론’을 통해 어린 사람들과도 중대어(반말)로 토론하며 존이 되어 누구를 비난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저자의 반말 철학은 '중대 사상’이며, 이는 부처의 중도, 공자의 중용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지만, '대파토론’이라는 확실한 아웃풋이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저자는 자신의 중대 사상을 비판하되 질책하지 말고 지적하라고 요구한다. 사람을 대할 때 존대도 비대도 아닌 '중대’의 개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중대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 짐승들처럼 서열 싸움을 한다. 중대 사회를 만들어야 사회의 온갖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문화를 극대화하여 세계에 그 힘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국가 문화의 변화와 혁신: 기업의 역할
故 이건희 회장의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처럼, 기업 문화 단위의 변화와 혁신이 초일류 기업을 만들듯, 국가 문화 단위의 변화와 혁신이 초일류 국가를 만든다. 현재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숙제는 바로 이 국가 문화의 변화와 혁신이다. 정부나 단체에는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이유나 의지가 없으므로,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이 이 역할을 해야 한다. 기업들은 모든 사원들이 반말 이름(예: 대파 류기풍)을 만들고, 중대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다른 기업들도 따라하게 만들어 국가 전체의 문화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이재용 회장이 선친 이건희 회장의 혁신을 이어받아 이러한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는 이재용 회장이 2류 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였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현재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고 젊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것은 2류 국가와 낡은 기업 문화 때문이다. MZ세대들이 퇴사하는 주된 이유는 파벌 싸움, 상사의 고압적 대우, 소모품처럼 느껴지는 자괴감 등인데,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바로 우리 말의 존비 구조에 있다. 기업들은 이러한 소통 문화를 중대 구조로 바꾸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다.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상처 주고 고통 주는 곳이 지옥이다. 죽어서 천국에 가려 하기보다, 살아서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반말하는 사람들에게 '너도 반말해’라고 열린 소통을 하거나, 서로 존댓말을 하는 사이에도 반말을 제안하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한다. 기업의 사장들은 직원들 간 직급, 나이 구분 없이 다 같이 반말하도록 선언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20년 전에 이미 시행했던 것처럼, 기업들도 '야자타임’이 아닌 ‘중대어’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중대어는 부르기 편한 반말 이름을 사용하되, 서로 격을 지키고 존댓말의 마음과 자세를 유지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반말이다. 배달 산업에 고급 두뇌들이 몰리는 현상은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엘빈 토플러가 2001년에 한국에 대해 예언했듯이, 신경제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사회 건설’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수직적 사회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의 관료주의적 피라미드 조직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수직적 사고를 바꾸려면 수직적 구조의 말을 바꿔야 한다. 즉, 존비 구조의 말을 버리고 '반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하지 못한다면 개인과 국가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 엘빈 토플러는 한국이 '저임금 경제의 종속 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주도적인 선도 국가’로 남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면 일본이 아닌 중국에 의해 강요당할 것이다. '반일은 정신병’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반일 감정에 휩쓸려 국익을 해치는 멍청한 행동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착하지만 멍청함은 사악함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선도 국가가 되기 위한 길은 경제에서는 대기업 집중 완화, 민간에서는 수직적 사회 탈피, 정부에서는 유연하고 수평적인 구조, 교육에서는 창조적 능력 배양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수직적 사회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곤충의 탈피처럼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말’이기에, 수직적 구조의 말을 바꿔야 한다.
동굴에서 벗어나 중대 세상으로
이 영상은 우리 민족이 5천 년 동안 갇혀 있던 '존비의 세계관’이라는 동굴에서 나온 다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존비의 세계에서는 협력, 타협, 소통이 없고, 오직 존의 괴롭힘, 비의 억울함, 존의 기득권, 비의 무력감만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관을 지탱하는 핵심은 폐쇄주의다. 북한이 '최고 전’을 강조할수록 최고 수준의 폐쇄주의가 필요하며, 조선 역시 양반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쇄국 정책을 고집하고 개혁 사상가들을 죽였다. 현재 한국은 하드웨어적으로는 개방적이지만,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조선과 북한처럼 여전히 폐쇄적이다. 19세기 김옥균 같은 개혁 사상가가 지금 시대에는 저자 자신과 같다고 비유한다. 해병대 ‘아이스 에이지’ 문화처럼 폐쇄적인 존비 세계에서는 부조리나 억울함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 폐쇄적인 존비 구조의 국가는 사회적 에너지가 갈등과 대립으로만 소모되어 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이나 북한보다 나은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다. 이는 북한과 중국이라는 위협 속에서 '생존’의 문제다. 동창들끼리 대화할 때처럼 서로 비대하는 저급한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없다. 또한 서로 존대하는 조직도 형식적인 존대일 뿐, 결국 감정 싸움으로 번져 문제 해결이 어렵다. 저자는 존과 비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중대’라는 대안을 제시했으며, '대파토론’으로 중대 사상에 따른 논쟁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우리 민족의 '한’의 실체는 가족 간의 학대와 고통이 세습되는 존비 구조의 언어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빨래를 똥통에 버린 일화처럼, 가족 간에도 서로 지옥을 전파하고 세습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존비 구조의 언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 존대도 비대도 아닌 '중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중대의 세상을 만들어야만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고 문화를 발전시켜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
LiveWiki, 유튜브 영상 속 핵심을 한눈에! https://livewiki.com/ko/content/korean-global-language-2



요약
핵심 주장 “존댓말을 버려야 대한민국이 산다” - 한국어의 존댓말/반말 구조가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이며, '중대어(中待語)'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 주요 내용 구성
대한민국 국호의 문제점
고종(이명복)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 다니던 시기에 만든 '대한제국’에서 유래 역사적 업적 없이 '대(大)'자를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 11년간 7번의 파천(逃亡) 시도
한국어의 이중성
위대함의 3가지 특징: 소리의 완전함, 단어의 완전함, 문장의 완전함 (3차원 언어) 비천함의 특징: 존(尊)/비(卑) 구조 → 질책, 폭력, 폐쇄성으로 이어짐
존비 구조의 문제점
북한의 비참한 현실도 언어 구조 때문 군대, 교육계, 정치계 등 모든 분야의 갈등 원인 편가르기, 서열 문화, 소통 불가능
해결책: 중대어(中待語) 시스템
존대도 비대도 아닌 중립적 대화 반말 이름을 따로 만들어 사용 격은 지키되 형식은 반말
대파토론 제안
글로 하는 반말 토론 시스템 객관적 점수제로 승부 결정 K-토론으로 한류에 포함시키자
기업과 사회의 변화 촉구
삼성 등 대기업이 먼저 중대어 시스템 도입해야 수직적 사회에서 수평적 사회로 전환 필요 엘빈 토플러의 경고 인용
국가의 미래
문화 개방 없이는 망함 일본어, 중국어보다 우수한 한국어의 잠재력 위대함과 비천함의 갈림길에 선 한국
결론 존댓말/반말의 '존비 구조’가 한국 사회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며, 이를 '중대 구조’로 바꿔야만 진정한 대한민국,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